옹운
오늘따라 늦잠을 자는 진운의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흰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때보다 많이 자라긴 했어도 아가는 아가다. 좀 커다란 아가랄까. 아침 일찍 사무실에 간다고 나간 권과, 친구들 만나러 방금 나간 창민 덕분에 숙소엔 둘뿐이다. 얼마나 피곤하면 숨소리 한 번을 안 내고 곤히 자는 게 귀여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두 손을 침대 위로 올리고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데 진운이 눈을 떴다.
“ 형…? ”
맑고 새까만 두 눈이 천천히 뜨이는 걸 넋 놓고 보던 슬옹은 겨우 어. 라고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여기서 잔 거예요? 아니, 창민이형이 나 깨워 놓고 나가서. 왜요…?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너 돌보고 있으라고. 별 생각 없이 그대로 읊었는데 그 얼굴에서 아직 남아 있던 졸음이 싹 가신다.
“ 나 또 가위 눌렸어요? ”
“ …어. ”
그게 뭐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입을 한 일 자로 다물고는 반쯤 뜬 눈이 조금 더 가늘어진다. 따지고 보면 잘못한 건 니가 아니고 난데. 근데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 나는 그냥 니 얼굴만 봐도 이렇게 생생한데. 널 울리고 싶지 않아서, 다 잊은 척 하고 있는 건데. 아무말도 하지 않고 빤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한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킨다.
“ 형들 다 나갔구요? ”
“ 권이는 사무실, 창민이형은 친구들 만나러. ”
“ 아, 그럼 형. 아침 안 먹었겠…. ”
저를 올려다보면서 느슨하게 앉아 있는 진운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왜 그래요, 형. 약하게 흔들리는 눈이 한 번 감겼다가 뜨인다. 그 눈 속에 담긴 제 표정을 보고 슬옹은 문득 정신이 들며 이러면 안 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운은 기억하지 못 했다.
아무것도.
기억하거나, 꿈꾸거나
-
Together 2AM 에서 첫번째 통합북(총 네 파트)이 나옵니다. 가예약 기간: 7/1~7/31
위 글은 실제 팬북에 실리는 글의 미리보기입니다. 전편은 팬북에만 실리고 웹상에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제가 쓰는 글이에요.
지금 가예약이 너무 안 나와서 이러다 엎어지게 생겼어요... 좀 도와 주십셔...
| * 창운 “주파수가 잘 안 잡혀.” 라디오를 듣기 위해 오래된 카세트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던 녀석이 낑낑대다 말고 투정어린 한 마디를 했다. 제 딴에는 나름 혼자 힘으로 해보겠다고 십 분이 넘도록 붙잡고 있었지만 도저히 잘 되질 않는 모양인지 내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나를 쳐다보면서 “네가 해봐.” 말하기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주파수를 잡는데 십 분씩이나 걸리는 카세트 따위. 애초에 그른 거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해보겠느냐는 말이다. 십년이 넘게 쓴 카세트인데 고장 나지 않았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내가 도움을 주지 않자 다시 혼자 낑낑거리기 시작한 녀석에게 “포기 해.” 그랬더니 녀석이 불퉁하게 입을 내민다. “넌 생각하는 게 글러먹었어.” 내게 대뜸 퉁을 놓는다. 왜 내가 녀석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넌 너무 포기가 빨라.” “내가 뭘.” 녀석의 말에 일단 아니라고 반박을 하려 했지만, 듣고 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서 그럴 수 없었다. 녀석은 내게 그 한 마디를 하고 다시 카세트 다이얼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마치 대형수술의 집도의가 된 것처럼 손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내가 더 심장 떨려서 못 봐주겠다. 대체 저깟 카세트 다이얼 따위에 왜 저렇게 열을 내며 집착하는 건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안 된다. 내가 포기가 빠르다면 녀석은 아주 끈질기다. 일이든 사랑이든 뭐든 간에, 한 번 시작한 일은 좀처럼 포기하는 법이 없다. 나는 그런 녀석이 조금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다. 가끔은 그런 녀석이 무진장 안쓰럽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에도 녀석은 온 정성을 다하고 반드시 끝을 보고야 만다. 덕분에 쓸데없는 체력낭비를 하고 마는 것이다. 그냥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하고 안 된다 싶으면 어느 적당한 선에서 포기해버리면 안 되나. 아니면 중요한 일은 끝까지 하고 포기해도 괜찮다 싶은 일은 중간에서 걸러낸다던지. 왜 그렇게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해서 쓸데없이 체력과 감정을 소비하느냐 말이다. 몸 축나는 것도 생각을 해야지. 분명 나중에 녀석에게는 머리만 너무 앞서가다가 몸이 못 따라가서 헉헉거리는 때가 올 거다. “됐다!” 녀석이 갑자기 크게 소리쳐서 생각은 거기서 끝났다. 녀석의 말을 듣고 카세트를 보니 여태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들리던 카세트에서 놀랍게도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며 녀석의 끈기를 높게 사주기로 했다. 어쩌면 녀석의 말대로 내 생각은 글러먹었고, 난 너무 포기가 빠른 걸지도 모른다. “대단하다.” 진심으로 말했더니 녀석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는 거만하게, “내가 원래 좀 대단하지.” 그런다. 평소 같았으면 잘난 척하지 말라고 한 소리 했겠지만, 오늘은 왜인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들어서 “그래. 장하다, 장해.” 하면서 손바닥으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카악!” 기껏 칭찬의 의미로 머리 좀 쓰다듬었기로서니 그렇게 경기할건 뭐냐. 녀석이 너무 태나게 싫어해서 조금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이래봬도 내가 소심한 남자라는 걸 녀석도 알아야 할 텐데. “근데, 뭣 땜에 그렇게 열심히 주파수를 잡은 건데.” “몰라서 물어? 라디오 들으려고.” “그러니까 라디오를 왜 듣는데.” “아아, 오늘 소녀시대 나오는 날이거든.” 그 소리를 듣고 나니 정말 라디오에서 여자애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 수가 많다보니 제법 시끌벅적한 그 소리가 내게는 그저 소음일 뿐인데, 녀석에게는 꽤나 큰 의미인 듯하다. “소녀시대는 모든 남자들의 우상이지.”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이거, 그 남자가 디제이 하는 라디오 방송이지?” “아… 응.” 하지만 사실 녀석에게 중요한 건 깨알같이 떠드는 아홉 명 여자애들의 수다가 아니라 그 사이로 들리는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라는 걸 나는 안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몇 십 분이 다 가도록 오래된 카세트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정진운이라니. 정진운에게 있어서 이 남자의 존재는 내가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위대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진운이 저 남자를 좋아한다는데 이제 와서 내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넌 너무 포기가 빨라.’ 맞는 말이다. 난 포기가 너무 빠르다. |
너를 부르는 목소리 /깨알
-
위 글은 실제 팬북에 실리는 글의 미리보기입니다. 전편은 팬북에만 실리고 웹상에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
옹운
짙푸른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가 점심시간의 왁자한 소란에 섞여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아, 존나 덥네 진짜. 소보루빵과 우유팩을 한 손에 든 슬옹이 잎사귀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정오의 해를 피해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점심시간 종이 울린지 채 5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운동장은 어느새 공을 차는 학생들로 가득 차 먼지가 뿌옇게 일고 있었다. 그늘을 골라 앉을 자리를 만든 슬옹이 흙바닥을 몇 번 터는 시늉을 하고는 나무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곧게 선 플라타너스의 줄기에 등을 기대자 표피로부터 찬 기운이 등에 전해져 온다. 빵 봉지를 다리 위에 얹은 슬옹은 먼저 우유팩을 열었다. 찬 기운이 남아 있는 우유를 들이키자 식도가 차갑게 식으며 대낮의 더위가 조금은 가신다.
‘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다. 밥 같이 먹을 애도 없고.’
“같이 먹을 사람이 없는게 아니라 그냥 혼자 먹는게 편한 거거든.”
‘야, 요즘엔 그런걸 아싸라고 부른다며?’
“아싸는 무슨 아싸냐. 난 그냥 고독한 퇴마사라니까?”
‘어우, 중 2 돋네요.’
나무를 길게 감으며 슬옹의 옆으로 온 권이 반쯤 투명한 팔을 벅벅 문지르는 흉내를 낸다. 가늘고 투명한 권의 몸에 햇살이 비쳐 몸 전체가 빛난다. 바닥에서 30cm정도 가볍게 떠 있는 권이 슬옹의 우유를 빼앗으려 손을 뻗지만 물리력이 없는 손은 그대로 우유팩을 관통해버린다. 아쉬움에 울상을 짓는 권을 보고 슬옹이 피식 웃었다. 이미 죽은지 10년이 다 된 권에게 물체를 집는 능력 같은건 진작에 없어진 터였다.
권은 학교에 붙어사는 지박령이었다. 처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하교하려던 슬옹이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본관 서측 계단에서 권을 마주쳤을 때, 초음파에 가까울 정도의 고음을 내지르고 혼절해 버린건 인간인 슬옹이 아니라 귀신인 권이었다. 더위에 축 늘어져 녹아내릴 듯 바닥으로 영혼이 번져가는 권을 곁눈질한 슬옹이 손 끝으로 권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야, 귀신도 더위 타냐. 영력이 깃든 손길이 영에 부딪히면서 작게 스파크가 인다.
‘아, 씨발! 야! 건드리지 말라고! 따갑단 말야!’
권이 새 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슬옹의 등을 걷어차는 시늉을 했다. 분명 죽은지 10년이나 지났는데 권의 말투는 지금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것과 진배없다. 워낙 성격이 외향적이고 유행에 민감한 탓일거라 슬옹은 추측했다. 첫만남 이후 권은 슬옹에게 자신이 연예인 지망생이었다고 이야기 했다. 모의고사를 제끼고 참가했던 어느 오디션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는 자랑도 덧붙여. 합격통지를 받고 신나서 뛰어오다가 신호를 무시한 차를 보지 못하고 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슬옹의 눈에 빤히 보이는 사실이었다. 죽는 것도 꼭 지같이 죽었네. 슬옹은 혀를 찼지만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학교를 배회하는 권을 내심 가엾게 여기고도 있었다.
이로 비닐봉지를 뜯은 슬옹이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2교시가 끝나고부터 내내 비어 있었던 위장에 음식이 들어가자 그것이 신호인 것 마냥 위가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입 안 가득 빵을 넣고 뺨이 미어지도록 씹던 슬옹이 문득 피부를 스치는 여름답지 않은 한기에 고개를 들었다. 영력을 가진 사람답게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 틀린 적은 없었지만 눈 앞의 풍경은 어제, 그리고 방금 전과 다를 것이 없는 청량한 여름의 학교일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운동장부터 교문, 별관 쪽 건물을 훑던 슬옹의 눈에 키가 크고 마른 소년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소년은 헤드폰을 낀 채로 본관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음악을 듣는지 가볍게 흔들리는 소년의 머리에서 단정한 머리카락이 사라락 흐트러졌다 가라앉는 것을 반복했다. 슬옹의 시선이 소년의 뒤통수로부터 내려가 등에 머물렀다. 땀에 젖은 교복 셔츠가 등에 달라붙어 척추의 움푹 패인 부분이 드러나 있었다.
"야. 조권."
'엉? 왜?'
"너 쟤 아냐?"
'누구?'
"저기, 헤드폰 쓰고 있는 애."
'아, 정진운? 왜? 귀여워? 맘에 들어? 소개시켜줄까?'
으흐흐, 야살스럽게 눈을 흘기는 권의 팔을 꽉 잡은 슬옹이 권을 끌어 당겨 소년 쪽을 향하게 했다. 진지하게 뜨인 슬옹의 눈에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슬옹이 미간을 찡그렸다. 두 눈에 선명히 박히는 소년의 기운은 보통의 고등학생과는 확실히 달랐다.
"헛소리 하지 말고. 쟤 좀 잘 봐."
'왜? 뭐가? 귀엽네. 아 근데 키는 왜 저렇게 커. 하여간에 요즘 애들이란 저 몹쓸 기럭지. …그러고보니 너도 크잖아? 나도 죽기 전에 좀 더 컸으면…."
"아 좀 닥치고. 그거 말고. 쟤 봐. 쟤 좀 느낌이 이상하지 않아?”
‘…글쎄? 그러고 보니 좀 뭔가 끼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제야 권이 고개를 빼 소년을 유심히 살폈다. 교복 셔츠의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소년의 팔은 바람에 나부낄 듯 뼈가 가늘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함이 문득문득 소년의 가는 팔목에서 드러났다. 순간 눈 앞이 팽 돌 정도로 강한 볕이 내리쬐었다. 슬옹이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직사광선이 그대로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소년의 주변만 미묘하게 먹구름이 낀 것마냥 흐렸다. …뭐지. 이상한데. 그 때였다. 갑자기 소년의 날개뼈 부근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물거리며 돋아나왔다. 슬옹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검푸르게 소년을 감아올리는 기운에서 번져 나오는 악의가 슬옹에게까지 전해왔다. 손 끝에서부터 어깨까지 순식간에 돋는 소름에 슬옹이 자신도 모르게 팔을 쓸어올렸다. 크게 번진 기운은 먹물처럼 번져 소년을 먹어치울 듯 감싸고 있었다. 소년의 흰색 교복 셔츠자락에서 시작되어 팔과 목덜미로 번지고 이내 층을 내어 쳐낸 암갈색 뒷머리를 검게 물들였다.
어, 어? 반사적으로 튕기듯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슬옹이 그대로 달려가 소년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소년을 감싸고 있던 기운은 슬옹의 손아귀를 피해 연기처럼 공중에서 사라졌다. 허억, 다른 한 손으로 무릎을 짚은 슬옹이 숨을 몰아 쉬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목구멍을 눌렀다. 기도를 타고 역류하는 날숨을 씹어 삼킨 슬옹이 고개를 들자 동그랗게 뜨인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추울 정도로 느껴지던 악의는 사라지고 소년은 다른 학생들과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후, 슬옹이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색이 연한 눈썹과 유선형으로 길게 끝이 빠진 눈을 차례로 훑은 슬옹의 시선이 이름이 새겨진 소년의 가슴께에 머물렀다. 정, 진운… 무심결에 따라 읽은 이름이 입술 끝에서 흩어졌다. 끝에 울림이 있는 이름이었다. 소란스러운 교정 내에서 슬옹과 진운이 있는 곳만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낯선 적막은 이내 진운의 입에서 떨어진 말로 깨어졌다.
“…누구세요?”
너의 노스탤지어 /휘나
-
위 글은 실제 팬북에 실리는 글의 미리보기입니다. 전편은 팬북에만 실리고 웹상에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
운옹
피를 삼킨 모래가 붉게 빛났다. 그간 쌓여온 수많은 피에 한 사람의 것이 더 얹어졌을 뿐인데, 사막은 기쁜 바람소리로 울었다. 한 쪽으로 천천히 밀려가는 모래언덕의 저 너머로, 전대 술탄의 머리를 내던진 진운이 화사하게 웃었다. 채 굳지 않은 피가 한쪽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음에도, 그 미소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나를, 따르겠습니까?"
나지막한 진운의 한 마디에, 멍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진운의 발 아래 엎드렸다. 알라의 축복이 당신에게 있기를! 앞다투어 진운의 발등에 입맞추는 수많은 사람들의 키스 세례를 받으며, 진운은 모래바람에 파묻혀 가는 전 술탄의 초라한 머리를 바라보았다. 인샬라. 진운은, 이제 그들의 새 술탄이었다.
인샬라- 신의 뜻대로
전 술탄의 폭정으로 피폐해진 사막의 나라는 곳곳에 진운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아래에 있을 때는 그저 힘들구나 했던 나라는, 위로 올라오자 썩은 부위가 곳곳에 보였다. 백성들의 등골을 파 먹는 관리들을 잘라내는 것이 가장 먼저였다. 그 다음으로는 세금을 줄이고, 우물을 파고, 수로를 냈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없도록 국고에 저장된 밀을 풀고, 기운이 남아 있는 남자들을 모아 밭을 일구게 했다. 전 술탄이 온 나라에 내 놓은 상처를,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곪아터진 부분을 짜 내며 치료하는 것만으로도 진운은 충분히 바빴다.
그러나 폭정을 일삼던 방탕한 전 술탄의 흔적은 궁에도 남아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진운의 손으로 연 새 세상이 시작되고도 삼 개월 후였다. 새로운 활기가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궁 안에서, 유일하게 조용하다 못해 긴장되어 있던 장소. 신료 중 하나가 하렘은 어찌 하실 것입니까, 묻지 않았다면, 삼 개월이 더 지나서도 진운은 그곳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진운에게 있어 하렘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던 유년기 시절의 전부였다.
하렘은, 거대한 술탄 궁 한쪽에 따로 네 채의 궁을 내어 지어진 곳이었다. 각 궁마다 공중다리로 연결된 하렘은 전대 술탄의 취향대로 아주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넓었다. 진운은 아주 어린 시절의,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하렘의 입구로 들어섰다.
한때는 향기로운 술이 흘렀을 조그만 시내는 이제 멎어 있었지만, 그 술 위를 떠다녔을 세공된 유리잔은 조그만 수로 안에 그대로 들어있었다. 물이 부족한 사막답지 않게, 하렘 안은 항상 숲이 울창했다. 붉고 푸르고 노란 색색깔의 귀한 꽃들도 흔하게 널려 있었다. 백성들의 농사를 위해 풀어 주었다면 다섯 개의 거대한 밀밭을 일굴 수 있을 정도의 물이, 단지 아주 잠깐의 헛된 감상을 위해 낭비된 것이다. 여자와 유흥에는 그 무엇도 아끼지 않던 전대 술탄은, 모든 것이 건조하고 부족한 사막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를 자주 부렸다. 전대 술탄은, 사막에서 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오죽 했으면."
이를 악문 진운이 중얼거렸다. 오죽 했으면 여자까지도 사막의 밖에서 데리고 오는 일이 있었을까.
진운의 어머니는 동양인이었다. 이글거리는 사막의 태양과 어울리지 않는 진운의 피부는, 술탄의 궁에서도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 덕분에 술탄의 눈 밖에 난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을 때에도 '독특한' 진운만큼은 살 수 있었던 것이고.
기억이 희미한 어린 시절과는 많이 달라진 하렘 안을 천천히 돌던 진운은, 문득 낯익은 분수대를 발견했다. 역시 사막에서는 나지 않는 종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분수대는 진운의 기억 안에서 언제나 투명한 물을 사시사철 뿜어올리던 것이었다. 사막에서는 물 한방울조차 귀하디 귀한 것이라는 것을 당시의 어린 진운은 전혀 몰랐을 정도로, 물이 사방으로 철철 넘치도록 아낌없이 뿜어내던 분수대였다.
그 분수대조차 진운이 새 술탄이 되면서부터 작동을 멈춘 모양이었다. 지금은 말라붙어 모래가루가 흩어져 있는 흰 분수대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누구?"
진운의 목소리에, 그가 천천히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진운은 잠시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렸다. 태양에게 사랑받은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그의 갈색빛 커다란 눈동자가 진운을 쳐다보곤, 정확히 두 번 깜빡였다. 진운이 아주 어렸을 적, 우연히 단 한 번 보았던 아름다운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사슴- 이라고 했던가. 술탄에게 바쳐질 성스러운 동물이라며 가까이 가는 것조차 매질로 금지당했던, 바로 그 짐승. 아주 잠깐 스쳤지만, 날씬한 팔다리와 크고 깊은 눈이 사슴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누구냐?"
퍼뜩 정신을 차린 진운이 다시 묻기 무섭게, 그가 훌쩍 분수대에서 뛰어내렸다. 희고 얇은 옷을 추스리고, 반투명한 두파타로 황급히 얼굴을 가린 그가 진운의 반대편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옷의 밑단 길이가 짧은 탓에 채 가려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발목이 가늘었다.
"거기 서... 거기 서라!"
진운이 발을 굴렀지만, 눈 앞에서 사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운은 아직 잘 모르는 하렘 안 울창한 숲을 헤치고.
"젠장..."
소리치고 나서야 진운은 깨달았다. 이곳은 술탄의 하렘이며, 남자는 있을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저 남자는 대체 누굴까.
인샬라 - 신의 뜻대로 /오렌지뮤
-
위 글은 실제 팬북에 실리는 글의 미리보기입니다. 전편은 팬북에만 실리고 웹상에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
진창
“창민아 오늘은 뭐 시켜먹자 너 피곤하잖아.” “안 돼, 피곤해도 어쩔 수 없어. 오늘은 탕수육 해준다며!” “아 더워죽겠는데 무슨 탕수육이야 새꺄. 그냥 시원한 거 시켜먹어.” “아 됐고, 창민인 오늘 내가 몸보신 시킨다. 니들은 다 꺼져.” 어쨌거나 저쨌거나 창민의 몸은 하나니 가운데에 낀 창민은 난감하단 표정을 지으며 하하하하 웃고만 있었다. 니가 그러고 있으면 되냐, 뭐 하고 싶은지 빨리 정해라. 닦달을 해대는 선배들을 보며 어째야 하나 뒷목만 긁고 있던 창민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창민이 형, 오늘 저희 집 가요. 엄마 오셨다 가서 맛있는 거 되게 많아요.” “어? 어어…?” “형 소고기 좋아하시죠. 얼른 가요. 형 배고프겠다.” 야 정진운 우리도 입 있거든? 아니 것보다 니가 뭔데 창민이를 독점해서 니네 집으로 데려 가냐? 그건 안 될 말이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어디 학생증에 잉크도 덜 마른 까마득한 일학년이 선배님들 다 제치고. 정진운 저거 하여간 실실 웃으면서 사람 방심시켜놓고 꼭 저렇게 뒤통수를 친다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 신세가 된 고학번들이야 뭐라 하든가 말든가. 오늘도 그들 사이에서 위너가 된 진운은 창민의 등을 떠밀어 정말로 자기 집까지 창민을 데려왔다. 집에 소고기가 있다는 말은 진짜였다. 어머니가 들렸다 가셨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형은 맨날 거절도 못하고 네 형, 네 형.” “이쁘다고 잘해주시는 건데 그럼 어쩌냐.” “그렇게 귀찮게들 구는데… 속도 좋지.” 여자가 적은 공대다 보니 조금이라도 여성스러운 신입생이 있으면 으레 그 여학생이 과의 공주님이 되기 마련이라지만 특이하게도 이 과의 ‘공주님’은 창민이었다. 공주님이라기 보단 아이돌이랄까 뭐 그런 존재로, 과 사람의 반 수 이상은 창민을 끙끙 앓았다. 적당히 큰 키, 잘 관리한 좋은 몸, 잘 꾸미면 훈남 소리정도는 가끔 듣는 친근한 외모, 우수한 성적, 무난한 성격은 창민을 제외한 몇몇도 갖추고 있었지만 창민에게는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음식을 잘 한다는 것. 그것도 제법 먹을 만 하게! 인스턴트와 배달음식으로 얼룩지기 쉬운 영양소결핍 청년들에게 방금 지은 따끈한 밥을 제공해줄 수 있는 창민의 존재란 마치 신과 같았고, 그래서 다들 창민의 집으로 구름같이 몰려들곤 했다. 양손 가득 봉지가 뜯어질 듯 묵직이 담긴 식재료를 들고서. 그렇게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매정하게 쫓아내는 일 한 번 없이 그럴 듯한 밥상을 차려내는 창민을 누구나 찬양했고, 그러다보니 창민에겐 귀찮은 일들이 좀 늘어났다. 하지만 좀 귀찮은들 어떠랴. 그깟 밥이 뭐 얼마나 대단하냐 싶어도 하루 세끼 중 저녁 한 끼 -혹은 가끔 야식이나 점심 도시락으로 두 끼- 정도는 창민 덕에 멀쩡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꽤 영향력이 커서, 창민에게 한 번이라도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창민을 챙겼기 때문에 누군가는 식모라고 비웃는다고 한들 창민은 전혀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밥이야 자기도 먹으려면 해야 되는 거고, 이왕이면 디같이 먹는 게 좋고. 재료를 다 사다 날라주니 내 돈 안 들어, 밥만 해주면 뒷정리부터 설거지까지는 먹은 사람들이 다 해. 그러고서도 밥 해주는 거 고맙다고 마주칠 때 마다 음료수에 간식에 창민의 입에 뭘 물려주지 않고선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그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형 은근히 즐기죠?” “어? 어떻게 알았냐. 나 해먹을 밥 하는 김에 몇 인분 더 하는 걸로 틈만 나면 간식이나 뭐다, 시험 때 마다 족보까지 쏟아지니 남는 장사지.” “거기다 리포트 대신 써주는 선배들도 있고.” “거럼, 잘 아네. 그래서 소고기는 어디 있냐? 얼른 꺼내 봐라.” 원래는 창민을 데려와서 진운이 고기를 구워줄 셈이었는데, 창민은 아서라 너 시킬 바엔 내가 한다며 진운이 부엌에 들어오는 걸 극구 말렸다. 넌 그냥 앉아서 TV나 보고 있으라고. “소고기 굽는 게 뭐 어렵다구. 핏물만 가시게 하면 되는 거.” “밥도 내가 하는 게 더 맛있어.” “…형 설거지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죠?” “정답. 밥은 내가 할 테니까 설거진 니가 해.” 넌 눈치가 빨라서 좋다며 진운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준 창민은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쌀을 씻기 시작했다. 이제는 밥솥이 어디 있느냐, 쌀은 어디 있느냐 물어보지도 않는다. 진운의 집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자취방을 제 집만큼이나 자주 드나드는 창민은 그 집 주인들보다 그 집 부엌살림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이사 올 때 각자의 어머님들이 깔끔하게 정리야 해주셨겠지만 태어나서 20살 될 때까지 식칼은커녕 감자 깎는 칼조차 몇 번 쥐어본 적 없는 남자들은 대부분이 혼자 산지 일주일도 안 돼 부엌을 초토화 시켰다. 그렇게 죽어가던 부엌을 살려준 게 창민이니, 어찌 안 좋아할 수 있을까. “아, 진짜 맛있다. 형이 하는 밥이 진짜 맛있긴 맛있어요. 똑같은 쌀에 똑같은 밥솥인데 왜 이렇게 다르지?” “그게 연륜과 경력의 차이라는 거란다. 많이 먹으렴.” “아 형 정말 나랑 결혼해주면 안 돼요? 진심이에요.” “보자… 니가 한 열두 번째 남자쯤은 될 거 같은데? 그래도 괜찮으면 결혼 해 주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일이겠지만 창민의 과 사람들에게 있어서 창민을 향한 프로포즈는 마치 일상과 같았다. 창민이 해주는 밥을 한 숟갈 떠먹고 나면 다들 저도 모르게 결혼하자고 난리를 치게 되는 거다. 새파란 신입생일 때부터 이런 농담들을 들어온 창민은 이제 결혼하자는 말을 들어도 으레 흘려들었고, 마치 콩트라도 하듯 받아치는 데에도 이미 도가 텄다. “싫어요, 내가 첫 번째. 그리고 다른 남자 더 받아주는 것도 안 돼요. 나만 봐야 되요.” “날 원하는 사람은 많다. 그렇게 집착하는 건 곤란해. 날 그만 놔 줘.” “싫어. 형은 내꺼야.” “……그만할까?” “헤헤, 저건 좀 아니었나. 죄송해요 형. 소고기로 좀 봐주세요.” 걔 중에는, 정말 진심인 사람들도 물론 더러 있었다. 니가 장난으로라도 결혼하자는 말에 yes라고 할 때 마다 미칠 거 같다고. 아닌 거 알면서 혹시 하는 기대를 걸게 된다고. 그럴 때 마다 농담은 농담일 뿐, 이렇게 어색해질만한 관계는 싫다고 부드럽게 거절해온 창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이가 아닌 건 아니었다. 그렇게 진지하게 고백해 온 사람들 중엔 영 창민의 취향이 없다 뿐이었지. 창민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진지하게 창민을 대했다면 창민은 이미 넘어가고도 남았을 터였다. “정진운아, 너 말이다….” “…왜요?” “너….” “네.” “…아니다, 밥이나 먹자.” 그런 이유에서 이번 10학번 중에 가장 훈남이라는 진운이 저를 이렇게나 따르고 좋아해주는 게 창민은 싫지 않았다. 선배들에게 말장난하는 걸 배워 틈만 나면 저렇게 고백을 해대는데 그걸 받아쳐주다 보면 기분이 참 묘해지는 것이, 말투나 뭐 그런 거 보다는 진운의 눈빛에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왜 저렇게 날 쳐다보나 싶으면서도 설마 아니겠지- 하고. “형 근데 나는 진짜 진심인데.” 저 말이 진짠지 가짠지, 창민으로선 참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진심이 아니라면 웃어넘기면 그만이지만 만약 진심이라면? “흠….” “에이, 농담이에요.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창민이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진운은 이 상황을 그냥 넘겼다. 아무 것도 아니니 그냥 신경 쓰지 말라고. 그래 니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곧이곧대로 믿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었지만 안 믿는다고 하면 뭘 또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창민은 그저 먹던 밥이나 마저 꾸역꾸역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포기하면 편해 /기우사 - 위 글은 실제 팬북에 실리는 글의 미리보기입니다. 전편은 팬북에만 실리고 웹상에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 "당장 안 나올래?!" "아오- 저놈의 히스테리 아주... 간다 가! 권아, 형 갔다올게! 형 없는 동안 형이 보고 싶어도 꾹 참고 잘 있어야 되~ 형이 이따 올 때..." "아 빨리 가기나 해, 창민이형 성질내는 거 안 보여?" 아침부터 신혼부부의 출근 장면을 재현하는 임슬옹과 조권을 보면서 이창민은 생각했다. 애정도 저 정도면 병 아닐까, 병. 누가 들으면 로미오와 줄리엣 쯤 되는 줄 알겠네. 창민의 눈치를 살피는 권과 그런 권을 보며 사태파악 못하고 그저 헤벌레 웃고 있는 슬옹의 사이에서 참다못한 창민은 결국 슬옹에게 다가가 말 안 듣는 큰 개의 목줄을 잡아당기듯 슬옹의 넥타이를 잡고 질질 끌고 나오기 시작했다. 창민이형 왜 그래! 하며 또 지 애인이라고 임슬옹의 편을 드는 권에게 들을 잔소리가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끌고 나오지 않으면 실습 첫날부터 지각을 하는 불상사를 겪게 될 것이었다. "어디 전쟁에 징병당해서 끌려 가냐? 죽으러 가?" "너는 사랑을 몰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씹새야." 창민에게 욕을 들으면서도 임슬옹은 그저 실실 웃기만 한다. 콩깍지인지 콩꺼풀인지가 씌어도 아주 단단히 씌었다. 임슬옹을 아는 동기 놈들이, 저 오빠 멋있는 것 같애요... 소개 좀 시켜주세요, 하면서 들이대는 여자애들한테 '저 새끼 존나 하찮은데....' 라는 너나할 것 없이 똑같은 대답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걸, 임슬옹 본인은 아나 모르겠다. 조권 취향 한 번 참 아스트랄하다, 라는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지만 임슬옹의 인권을 생각해서 창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은 첫 날이었다. 그것도 무려 이창민과 임슬옹의 모교에서의 교생실습. 정장을 쫙 빼입은 둘의 모습은 단정하기 그지없다. ...입만 다물면. "야, 내 찬데 왜 니가 운전석에 앉냐?" "내 차 같은 소리하네. 정확히는 니네 형 차지." 뛰는 건지 나는 건지 모를 움직임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 1층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의 문을 연 창민은 운전석에 떡하니 자리 잡았다. 한 달간 학교에 출퇴근을 하기 위해 슬옹이 제 형에게서 빌린 차였지만, 임슬옹이 식탁에 툭 던져놓은 키는 창민이 어젯밤에 이미 접수했다. 임슬옹에게 맡겼다간 지각할 게 뻔하다는 이창민의 선견지명이 역시 딱 맞아떨어졌다. "어쨌든 내가 빌려 온 거잖아. 왜 니가 운전해?" "너한테 운전대 맡겼다가 황천길 갈까봐 무서워서 그런다. 버리고 가기 전에 빨리 타." 임슬옹과 조권의 애정행각 때문에 계획했던 출발시간에서 5분이나 지체됐다. 안 그래도 지금이 한창 출근시간이라 서둘러도 모자랄 판인데 저 자식 때문에 5분이나 늦었으니, 제 시간에 학교에 도착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다. 아, 나는 난폭운전은 취미 없는데. 창민은 운전대를 꽉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오랜만에 레이서다운 운전 실력을 발휘해야겠다고. "야! 노란 불이었잖아, 이 미친놈아! 눈까리는 폼으로 달았냐? 니 눈은 곰 인형에 붙이는 플라스틱 눈까리냐고?!" "닥쳐, 니가 권이 붙잡고 부비적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진 안 했어." "야, 야! 지각 한 번 면하려다가 비명횡사 할 일 있냐? 여기가 무슨 아우토반이라고 140을 밟아 이 싸이코야!" 아ㅡ 착하게 좀 살려고 했더니 임슬옹 이 새끼가... 창민이 크게 한숨을 쉬고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주정차금지 구역이라 조금만 늦으면 카메라에 찍힐지도 모르지만, 임슬옹의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 끼이이이익. "넌 임마, 운전의 기본이 안 되어 있어, 기본이~ 속도위반에 신호위반에 지금 무슨 레이싱 경주 하.." "닥치고 조용하게 학교까지 갈래, 여기서 내릴래." "닥치겠습니다." 그 후 슬옹은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착 후에는 안전벨트를 너무 꽉 쥐어서 저려오는 두 팔을 흔들거리며 팔이 아프다고 징징거렸다. 그러게, 이창민의 성격을 모르는 임슬옹이 아닐 진데 함부로 들이댄 것부터가 틀려먹었다. 그래도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정말 입도 뻥끗 안 하고 조용하게 온 게 기특해 창민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니, 권이가 애써서 만든 머리를 망친다고 또 난리다. 어쩐지 평소보다는 좀 더 나사가 잠긴 모습이라 웬일인가 했더니 역시나 조권의 작품이었다. 역시 임슬옹은 조권이 있어야 인간 구실을 한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4주 동안 2학년 1반에서 교생실습을 하게 된 국어 담당 이창민입니다. 모교에서 교생실습을 하려니 저 고등학교 때 은사님들도 계시고, 모교 후배들이라 더 친근한 마음도 들고 그렇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앞으로 4주 동안, 즐거운 학교생활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예-"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창민이 교실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환한 얼굴과 달리 머릿속에서 검은 실타래가 잔뜩 꼬이는 것 같았다. 남자 애인까지 있는 게이 임슬옹은 파릇파릇한 1학년 여자반 담당이라는데, 창민은 시커멓고 덩치만 큰 2학년 남자반이다. 신이 공평하다고 한 놈은 도대체 어디 사는 개 또라이인지, 잡히기만 하면 아주 그냥 아작을 내버리겠다고 창민은 웃는 얼굴로 생각했다. 실습을 나가게 될 학교가 자신의 모교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 전에 가지고 있던 여고에 대한 환상이라든가 선생니임~ 하면서 음료수를 건네 줄 여학생과 인기 교생이라는 로망 따위 접었었다. 하지만 자신이 다닐 때와 달리 재작년부터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구나 싶어 속으로 올레를 외쳤다. 그랬는데, 현실은 시궁창.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어째 요즘 애들은 이리도 발육이 좋은지, 앉은키만 봐도 저보다 작아 보이는 놈들은 손에 꼽을 정도고, 죄다 일어서기만 하면 창민이 올려다보게 생겼다. 절대 작은 키가 아니라고 자부하며 살았는데, 지금 이 순간만은 허우대 훤칠한 임슬옹이 부러워지는 이창민이다. "자습 시간이니까 반장은 애들 조용히 시키고, 이 선생님은 저 따라오시죠." "예."<br style="LINE-HEIGHT: 17px; FONT-FAMILY: verdana; COLOR: rgb(96,96,96); |



